제1차 세계대전(1914~1918)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하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암살당했다. 오스트리아의 변방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의 수도에서 발생한 이 작은 총성이 무려 2,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며 20세기를 여는 '원시적인 대재앙'의 시작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라예보의 총성은 유럽 전체를 볼 때 지극히 지엽적인 사건이었다. 19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에서 지배권을 상실하면서 세르비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발칸반도의 국가들은 독립했다. 하지만 보스니아는 1908년에 오스트리아에 병합되었다. 이에 세르비아가 발끈했다.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반도에서 슬라브계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던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병합이 슬라브 민족주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의도로 보았고, 궁극적으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압박으로 받아들였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발생한 두 차례의 발칸 전쟁으로 쇠약해 가던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자, 영토 분할과 독립을 놓고 발칸반도는 격랑에 휩싸였다. 그 혼란의 진원은 오스만 제국이 떠난 자리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려는 오스트리아와 그에 대항해서 범슬라브 통일을 주도하는 세르비아였다. 사라예보의 총성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의 오랜 갈등이 낳은 예고된 사건이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암살범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범슬라브주의 비밀 결사에 소속된 세르비아 청년이었다. 더 이상 세르비아의 준동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맹국이었던 독일에 침공 계획을 알렸다.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에 무조건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독일은 가장 가까운 우방인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 때문에 발칸반도에서 위축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무엇보다도 세르비아와 가까운 러시아의 영향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백지수표 확약을 바탕으로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그러자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후 일주일도 채 되기 전에 수많은 국가들이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전쟁 선포를 했다. 독일이 러시아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고, 영국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아시아에서는 1902년부터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은 유럽의 전쟁을 기회 삼아 중국의 청도에 있는 독일 교차지를 비롯해서 남태평양에 있는 독일 식민지를 차지하고,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경쟁하고 있는 러시아를 압박하려는 심산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선전포고로 세계는 크게 오스트리아 측의 동맹국과 세르비아 측의 연합국으로 나뉘었다. 동맹국의 핵심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였고, 연합국은 프랑스, 영국, 그리고 러시아였다. 가장 큰 관심사였던 미국은 중립을 선포했지만, 세계는 역사상 최초로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 통일 독일, '총칼 외교'로 프랑스와 영국을 위협하다
오스만 제국의 쇠락으로 발칸반도에서 힘의 공백이 나타나자, 유럽에서는 적어도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부터 지켜왔던 '세력 균형'의 원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력 균형을 뒤흔드는 진앙지는 독일이었다.
1871년 프로이센은 종교는 다르지만 언어와 문화가 유사한 사람들로 구성된 39개의 독립 국가를 통합한 통일 독일의 탄생을 선포했다. 1870년에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프로이센이 프랑스 역사와 문화의 자존심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승전과 함께 통일 독일을 선포한 것이다. 프랑스로서는 치욕적인 순간이었고, 독일로서는 게르만의 시대를 예고하는 영광의 순간이었다.
독일의 통일은 19세기 중반부터 강하게 태동하고 있던 민족주의의 발로였다. 독일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우며, 그동안 아프리카와 인도를 포함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영국과 그 뒤를 이은 프랑스 제국주의에 강력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민족적 우월주의는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서 무서운 속도로 서구인들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었다.
사회진화론, 즉 사회에서의 적자생존론이 국제사회 생태계에서도 적용되며, 가장 힘 있고 능력 있는 민족이 세계의 먹이사슬에서 최고의 포식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은 시대의 조류가 되었다. 특히 통일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후발주자로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은 과학적, 경제적, 역사적으로 그들의 민족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힘의 우위를 과시하며 민족적 자긍심을 표출하려는 민족주의는 이미 이성의 경계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곳곳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위험한 도발을 부추기고 있었다.
1884년부터 1985년 사이,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던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에서 지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겉으로 보면, 영국, 프랑스, 독일 세 나라가 평화롭게 아프리카 식민지 통치를 분할하는 것이지만, 식민지 쟁탈에 늦게 뛰어든 독일로서는 환호할 일이었다. 반면에 그동안 식민지 개척을 주도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약진에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특히 영국은 아프리카 대륙을 종단하는 철도를 건설해서 '카이로에서 케이프(타운)까지' 아프리카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세웠는데, 아프리카 중앙에 건설된 독일 식민지가 그러한 비전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독일은 1905년과 1911년 두 차례에 걸쳐 모로코 사태에 개입하며 아프리카북부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던 프랑스와 무력 충돌의 위기를 초래했다. 독일이 모로코 반란을 지원하며 무장 선박을 모로코의 아가디르 항에 상륙시키자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전운이 감돌았다. 다행히 프랑스는 독일로부터 모로코 지배권을 인정받고, 독일은 프랑스의 콩고 식민지 일부를 넘겨받으면서 사건이 일단락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양국 간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독일의 '총칼 외교'를 견제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