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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패권을 둘러싼 피의 전쟁(10) 잉카 제국은 어떻게 멸망에 이르렀을까?

by 더 클라우드 2025. 8. 18.

 

 코르테스가 아스테카 제국을 멸망시켰다는 소식은 제2의 코르테스 꿈꾸는 수많은 야심가들을 신대륙으로 떠나게 만들었다. 그중 한 사람이 프란시스코 피사로였다. 정복자 집안의 사생아로 태어난 피사로에게 신대륙은 유럽의 신분 제약을 떨쳐 버리고 마음대로 정복의 꿈을 펼칠 수 있는 환상으로 다가왔다. 1513년, 그는 스페인 원정대에 참가해서 처음으로 태평양을 보았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남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만 쪽으로 가다 보면 엄청난 황금 제국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그는 1524년 동료인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함께 두 척의 배로 남아메리카 해안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금 제국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피사로의 원정은 코르테스의 원정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맞닥뜨렸다. 가도 가도 끝없는 밀림의 연속이었고 모기떼에 시달려야 했다. 더군다나 코르테스와는 달리 대규모의 스페인 군대도 아니었고, 몬테수마에 대항하는 수만 명의 원주민 지원군도 없었다. 피사로가 파나마에 도착했을 때 그의 휘하에는 병사 180명과 말 30 필밖에 없었다. 얼마 후 병력 100명과 말 50 필이 추가로 합류했지만, 수만 명의 잉카 제국 전사들을 대적하기에는 그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들은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1532년 9월, 드디어 지금의 페루에 상륙했다. 수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에 있었던 피사로의 원정대가 어떻게 거대한 잉카 제국을 멸망시켰는지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시 잉카 제국은 아타우알파라는 황제가 통치하고 있었다. 피사로는 지금의 페루 북부에 있는 카하마르카라는 곳에서 아타우알파를 만났다.

11월 16일, 6,000명의 호위 부대를 이끌고 나타난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와 동행한 신부가 내민 책을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이는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신성모독이었다. 그 책이 바로 성경이었기 때문이다. 신부는 그 책에 신의 말씀이 들어 있다고 했는데, 책을 귀에 가까이 댄 아타우알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며 책을 던져버린 것이다. 피사로 군대는 공격을 개시했다. 화승총이 물을 뿜자, 아타우알파의 일행들은 혼비백산했고, 말 탄 정복자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피사로 군대는 잉카 제국의 전사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스페인 병사들의 피해는 고작 5명의 부상이 전부였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전투였다. 이는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도륙이었다. 아무리 스페인 병사들의 무기가 월등하다고 해도 6,000명의 잉카 전사들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전멸당한 것은 믿기지 않는다. 게다가 몇 킬로미터 후방에는 수만 명의 아타우알파의 군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만약 그 군대가 합류했다면 상황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만약은 일어나지 않았다.

 피사로 군대는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황제는 자신을 풀어주는 대가로 커다란 방을 황금으로 채워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정복자들은 아타우알파를 처형했다. 곧이어 피사로는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로 군대를 이동시켜 그곳을 점령했다. 잉카 제국은 결국 1572년에 멸망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할 당시만 해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고 있던 잉카 제국이 스페인 정복자들의 총칼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1. 유럽의 아메리카 정복이 '손쉬웠던' 세 가지 이유

 

 콜럼버스에서부터 코르테스, 그리고 피사로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사는 많은 의문을 남긴다. 그 의문 중의 하나가 어떻게 소수의 스페인 군대가 손쉽게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제압했는가이다. 물론 여기서 '손쉽게' 정복했다는 것은 다른 유럽의 전쟁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빨리, 그리고 적은 희생으로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고 지배했다는 것이지, 원주민들의 대항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스페인을 비롯해서 이후 유럽의 아메리카 정복사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된 후 그 '손쉬운' 정복의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 번째는 무기의 불균형이다. 구석기시대 수준의 무기로 무장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단단한 철기로 만들어진 창과 칼, 갑옷, 그리고 화승총과 대포에다 말을 타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유럽인들에 대항하기에는 그 한계가 너무 컸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병력 수에서 원주민들이 압도적인 우위를 갖고 있었는데, 그들이 쉽게 제압당한 것은 의아하다. 화승총의 경우만 보더라도 당시에는 장전과 발사의 시간적 간격이 컸기에, 원주민들이 훗날의 '인해전술' 방식으로 끊임없이 공격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특히 잉카 제국의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원주민 6,000명과 채 200명도 되지 않는 피사로 군대와의 대결이 그 좋은 예이다.

 두 번째 이유는 원주민 내부의 문제이다. 아스테카 제국의 멸망이나 잉카의 몰락에서 볼 수 있듯이 원주민 부족들 간의 갈등과 대결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손쉽게' 그들을 정복하게 만든 배경이었다. 원주민들 간의 전쟁은 일상이었다. 승자는 패자를 마음대로 유린했다. 패자는 승자의 노예가 되었고, 상당수는 승자의 인신 공양의 희생 제물이 되었다. 서로 간의 증오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그런 증오심을 이용해서 용이하게 그들을 정복했다.

 마지막으로 유럽인들이 가져온 각종 전염병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했을 당시 남아메리카에는 900만 명에서 1,600만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스페인의 정복 이후 생존한 사람들은 불과 200만 명에서 400만 명이었다. 스페인 정복 전쟁으로 그곳 원주민의 4분의 3이 사라진 것이다. 그중에 적어도 80% 정도는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 통계가 맞다 하더라도 그것이 너무 강조되어서는 곤란하다. 아무리 유럽인들의 전염병이 원주민 말살에 가장 큰 이유라고 하더라도, 스페인의 정복 전쟁에 의해 희생된 원주민들의 숫자가 인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규모라는 사실을 덮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