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급격한 산업화로 유럽 시장을 장악한 독일
독일의 '총칼 외교'에 가장 놀란 나라는 영국이었다. 1911년 제2차 모로코 사태에서 독일이 모로코의 아가디르 항에 군함을 파견한 것은 프랑스에 대한 무력시위였지만, 영국은 궁극적으로 영국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다. 영국은 19세기 내내 해상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잇었으며, 어떤 나라도 영국의 해군에 도전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독일이 지중해의 서쪽에서 대서양으로 연결되는 모로코에 전함을 파견했고, 그것은 영국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 아니었다. 당시 영국의 해군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아가르디르 위기'가 세계대전으로 가는 '아마겟돈'이 될 것으로 예견했다. 세계사의 흐름을 읽는 데 탁월했던 그 젊은 정치인은 그때부터 세계 패권의 판도를 뒤흔들 빅뱅이 가까워진 것을 직감한 것이다.
통일 이후 독일 군사력은 놀라운 속도로 증강되고 있었다. 이미 세계 최강의 육군은 ㄹ소유한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을 완성한 후 해군력 증강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는 곧 독일이 해양에서도 영국의 주도권에 도전하겠다는 것이었다. 19세기 초에 나폴레옹도 성공하지 못했던 것을 독일이 시도하고 나서자, 영국으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군사력은 단순히 민족주의적 이상에서뿐만 아니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산업화가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일 이후 20년 만에 독일의 산업은 영국, 프랑스와 비슷한 수준으로 성장했고, 어느 부분은 앞서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적어도 100년 이상이 걸렸던 산업화가 독일에서 순식간에 이뤄졌다. 산업화의 '철마'인 철도는 석탄과 철강 산업의 붐을 이루었다. 독일의 석탄과 철강 생산은 영국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왔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에 독일은 영국보다 2배 이상 많은 철강을 생산하게 되었다. 제품 수출에 있어서도 독일의 약진은 놀라웠다. 통일 당시에 독일 수출품의 3분의 1만이 완제품이었으나 1913년에는 그 비중이 63%로 증가했다. 독일은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유럽 대륙의 시장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급격한 산업화로 일자리가 늘어나자 독일인들 중에 이민 나가는 숫자도 급속히 감소했다. 1880년대 연평균 13만 명에 달하던 이민자 수는 1890년대 중반에는 2만 명으로 극감 했다.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가기보다는 '독일 드림'의 중심지인 베를린과 루르로 갔다.
강력한 산업화는 군사력의 증강으로 이어졌다. 세계 제1의 육군력을 자랑하는 독일은 영국의 해군력을 따라잡기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투입했고, 19세기말에 독일은 영국에 이어 두 번째로 강한 해군을 갖게 되었다. 최강 육군과 세계 2위의 해군력을 갖춘 독일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에서 독일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했고, 독일 국민들은 그것이 허황된 꿈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다.
3. 전사자만 2,000만 명,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군사력의 증강으로 유럽 열강은 자신감이 넘쳐났다. 전쟁이 일어나면 누구나 승리는 자신들의 몫일 것이라고 자신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은 100년간 대규모 전쟁을 겪지 않았기에 전쟁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은 민족주의, 애국주의와 함께 더욱 부풀어갔다. 독일은 심지어 다가오는 전쟁을 기대하고 있었으며, 군사 전략가들은 방어적 전술보다는 공격적 전술을 짜는 데 몰두했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알프레드 폰 슐리펜 장군은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고 주장하며 1905년부터 이른바 '슐리펜 작전'을 세웠다. 이는 전쟁이 발발하면 러시아가 대응할 시간을 갖기 전에 벨기에를 통해 빠른 시일 내에 프랑스를 제압한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전쟁이 계획대로 전개되지 않을 수 있고, 공격형 전술이 절대적으로 유리하지도 않으며, 그렇게 빨리 끝나지도 않는다는 현실을 알기까진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전쟁 발발과 함께 예상대로 독일은 벨기에를 침공해서 프랑스 영토 내에까지 빠르게 진격했지만, 파리 근처의 마른강 전투에서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에게 저지당하며 진격의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동부전선에서는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의 진격을 물리치며 동부 프로이센과 폴란드를 지켜내기는 했지만, 독일은 이제 동서 양쪽 전선에서 힘겨운 방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슐리펜 작전의 실패로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독일군과 영구, 프랑스 연합군은 참호전에 돌입했다. 자동으로 발사되는 기관총의 등장과 철조망은 나폴레옹식의 대열 전투 공격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서로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겠다고 참호를 나와 돌격했고, 그럴 때마다 수많은 병사들과 말들이 기관총에 맞고 철조망에 걸리는 참극이 벌어졌다. 1916년 7월에 시작된 솜 전투에서 프랑스와 영국군은 겨우 15km를 전진했는데, 그 과정에서 60여만 명의 프랑스와 영국군, 그리고 비슷한 수의 독일군이 다치거나 전사했다. 인류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처참한 전투였다.
지루한 참호전이 계속되자 전쟁은 물자와의 싸움이 되었다. 탱크, 독가스, 비행기 등 온갖 신무기들이 등장하면서 참전국들은 모든 자원과 기술력을 동원해 군수 물자를 생산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공장은 더 많은 무기를 생산해야 하고 농촌은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해서 전선에 투입해야 했다. 하지만 국내 생산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에 해외 물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변수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이미 철강, 석탄, 석유 등 주요 산업에서 세계 최강 국가로 부상했을 분만 아니라 농산물에서도 최대 수출국이었다. 미국은 중립국으로 남아서 '전쟁 특수'를 누리고 있었지만, 미국의 교역은 프랑스와 영국 쪽에 치우쳐져 있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연합국에 물자르 ㄹ제공하는 미국의 상선을 저지하지 않고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1917년 초, 독일은 결단을 내렸다. 중립국 선박이라도 연합국에 군수물자에 해당하는 물품을 운송하면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이는 사실상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독일 정부를 장악한 군부는 미국의 물자를 막고 서부전선에서 총공세를 가하면 전쟁을 승리로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결국 4월 초 미국은 독일에 전쟁 선포를 했다. 미군이 도착하자 서부전선의 연합군 참호에선 환호가 터졌지만, 독일군 참호에선 한숨 소리가 나왔다. 참호전은 심리전이었다. 미군의 참전으로 연합군은 기세가 등등해졌지만, 독일군의 기세는 꺾이기 시작했다. 미군의 전투력이 우수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풍부한 물자를 독일은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거친 후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소련)으로 확장되어 재탄생했고, 다음 해 3월 전쟁에서 손을 뗐다. 이로써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부담감을 덜었지만, 승패의 열쇠를 쥐고 있는 서부전선에서 미군의 참전으로 계속 수세에 몰렸다. 결국 1918년 11월 11일 독일은 휴전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4년여 만에 포성이 멎고 포연이 걷혔다. 전사자만 무려 2,000만 명으로 그때까지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간 참혹한 전쟁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