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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패권을 둘러싼 피의 전쟁(3)

by 더 클라우드 2025. 8. 11.

 4. 훗날 더 큰 비극을 부른 베르사유조약

 1919년 초부터 시작된 평화회담은 주로 영국, 프랑스 , 미국, 이탈리아의 '빅 4'가 주도했다. 회담에서는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의 입김이 가장 컸다. 전재로 가장 많은 인명 및 물리적 피해를 입은 나라가 프랑스였기 때문이다. 약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프랑스 산업화의 일번지였던 북동부의 석탄과 철광석 지대는 황폐해졌다. 클레망소의 목표는 독일을 경제적, 군사적, 영토적으로 약화시켜 다시는 프랑스를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역을 할당받고 독일이 라인란트를 비무장화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프랑스는 독일의 경제를 완전히 붕괴하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다고 보고, 독일에 전쟁 책임을 물어 1,300억 마르크(330억 달러)에 해당하는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했다. 지금의 가치 기준으로 약 5,880억 달러(약 780조 원)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영국의 입장은 프랑스와 약간 차이가 있었다.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는 전후 독일이 완전히 무너지고 프랑스가 독일을 대신해서 유럽 대륙의 강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했다. 동시에 독일이 패배를 극복하고 소련 주도의 공산주의로부터 서구 유럽의 자본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복원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자 했다. 그동안 해외 식민지 경쟁에서 영국에 위협적이었던 독일 식민지 제국을 해체하고 그 일부 영토를 양도받았다. 독일은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게 되었다.

 미국은 승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협상 테이블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세계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 참전을 결심했고, 14개 조 평화 원칙을 내세우며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주창했다. 하지만 '유럽 문제는 유럽이 알아서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회담에 임한 프랑스와 영국이 주도권을 잡았기에, 윌슨의 영향력은 한계가 있었다. 다만, 윌슨은 항구적인 평화를 보장할 국제연맹을 제안해서 그것을 출범시키는 데 성공했다.

 1919년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10~13%의 인구와 영토를 잃고 식민지 전부를 잃었으며,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독일의 분노는 훗날에 더 큰 비극을 초래했다. 윌슨은 국제연맹의 출범으로 평화가 보장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정작 미국 의회는 미국의 전통적인 먼로주의 원칙에 입각해서 미국이 국제연맹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미국이 빠진 국제연행은 주요한 국제분쟁과 전쟁을 막을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베르사유조약은 다가오는 더 큰 전쟁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우크라이나는 동쪽으로 러시아, 북쪽으로 벨라루스, 서쪽으로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와 국경을 이루고, 남쪽으로는 흑해에 맞닿아 있다. 국토 면적으로만 따지면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큰 나라이다. 비옥한 흑토와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한 우크라이나는 9세기 후반에 동유럽 슬라브족들이 세운 '키이우(러시아어로 키예프) 루스'라는 나라의 중심 지역이었다. 키이우 루스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의 기원이 되는 나라인데, 키이우의 이름을 따서 국명이 지어졌듯이 키이우를 중심으로 지금의 우크라이나가 키이우 루스의 중심지였다.

 우크라이나의 불운한 운명은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략과 함께 찾아왔다. 1236년에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가 키이우 루스를 침략해서 키이우를 완전히 파괴하고, 키이우 루스를 멸망시켰다. 당시 키이우의 인구가 5만 명이었는데 단지 2,000명 정도만 살아남았을 정도로 키이우는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로 폐허가 되었다. 몽골 침략으로 키이우가 몰락 하자, 당시 키이우에 비해 작은 도시 공국이었던 모스크바가 그 지역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 제국에 협조하면서 주변 지역을 합병하며 세력을 키웠다. 몽골 제국이 물러난 이후 16세기에 우크라이나는 한때 폴란드에 합병되기도 했지만, 이후 16세기에 우크라이나는 한때 폴란드에 합병되기도 했지만, 이후 19세기까지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영토는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었고, 일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20세기에 들어서 우크라이나는 거대한 세계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혼란기에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시도하여 '우크라이나 국민 공화국'을 설립했으나, 1922년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로 합병되고 말았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란 이름으로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에 합류된 것이다. 하지만 1991년 또 하나의 거대한 세계사의 격동 속에 우크라이나는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우크라이나는 드디어 숙원이었던 독립 국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안한 독립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영토 안에는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러시아계는 주로 우크라이나의 동부와 남부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크림반도에는 무려 70% 정도가 러시아계였다. 수도 키이우에는 인구의 13%가 러시아계였다. 이런 민족적 분포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실질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이루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의 방대한 영토뿐만 아니라 경제적 가치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독립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우크라이나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수력발전 등으로 그동안 러시아의 기계 제조 공업 및 화학 공업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었다. 무엇보다도, 유럽은 천연가스의 40%를 러시아에서 공급받는데, 그 공급 파이프 라인의 80%가 우크라이나를 통과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파이프 라인에 문제가 생긴다면 러시아로서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세계 4대 곡창지대의 하나로서 밀, 옥수수, 보리 같은 곡물의 주요 생산지이고 축산도 발달해 있어 소련의 가장 중요한 농목축 지역이었다. 이런 고시 완전한 독립 국가로 자리를 잡게 된다면 러시아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