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크라이나인들의 분노와 증오, 그 시작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위치와 경제적 조건을 놓고 볼 때, 우크라이나가 독립 이후에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양국이 함께 윈윈 할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두 민족의 오랜 역사적 기억은 그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소련 시대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기억에는 분노와 증오가 가득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30년부터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에 집단 농장 체제를 도입한 것이었다.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의 농부들을 국가가 운영하는 집단농장으로 몰아넣었다. 이 과정에서 농부들은 땅과 재산을 몰수당했고, 집단농장으로 이주를 거부하는 농민들은 총살당하거나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집단농장화 정책은 우크라이나의 대기근을 촉발했고,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만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스탈린의 통치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기근으로 사망한 숫자는 적게는 800만 명에서 많게는 1,0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를 가리켜 굶주림(holod)을 통한 살해(mor)란 의미의 홀로도모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즉 홀로코스트를 유대인들이 잊지 못하듯, 우크라이나인들은 홀로도모르를 잊지 못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우크라이나는 또다시 비극을 맞게 되었다. 1941년 중순 독일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소련과의 동부전선 전투를 개시했다. 독일군은 키이우에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소련군 포위 작전을 펼쳤다. 약 70만 명의 소련군이 목숨을 잃었던 이 작전에서 수천 명의 우크라이나인들도 목숨을 잃었던 이 작전에서 수천 명의 우크라이나인들도 목숨을 잃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800만 명에 이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망했다. 군인 사망자로 보면, 소련군 사망자는 1,100만 명인데, 그중에 270만 명이 우크라이나인들이었다. 전쟁 전에 4,170만 명이 우크라이나에 살았는데 전쟁이 끝날 때 2,740만 명만이 남아 있었다. 약 1,500만 명이나 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전쟁 중에 사망했거나 우크라이나를 떠났다는 것이다.
전쟁 후 소련은 우크라이나가 전쟁으로 받은 희생과 전쟁에 대한 공헌도를 상기하곤 했다. 소련에서 전쟁 영웅으로 포상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18.2%가 우크라이나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우크라이나와 소련과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스탈린의 철권통치로 수백만 명이 희생된 우크라이나인들이 쉽게 소련에 우호적인 감정을 가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전쟁을 치르면서 드러난 우크라이나 내의 민족적 분열도 전후 우크라이나의 진정한 통합에 걸림돌이 되었다. 전쟁 중에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 150만 명이 학살되었는데, 학살에 가담한 친나치 우크라이나인들에 대한 러시아계의 따가운 시선은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의 분열과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에 협조한 우크라이나인들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대체로 그들은 소수의 극단적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지금까지도 우크라이나인들을 친나치 백인우월주의들이라고 몰아붙이며 비판을 멈추지 않고 있다.
2. 두 나라 악연의 시초가 된 370년 전의 조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정부는 우크라이나를 다독이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소련은 1954년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제안에 따라 페레야슬라프 조약체결 300주년을 기념해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양도했다. 페레야슬라프 조약은 1654년 카자크 수장국(우크라이나)과 루스차르국(러시아) 간에 체결한 조약으로, 두 나라가 연합해서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에 맞서 싸우자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중간에 일방적으로 전쟁을 멈추고 폴란드와 평화협정을 맺은 후 우크라이나 영토를 폴란드와 나눠 가졌다. 이 조약은 현재까지도 양국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는데, "러시아는 카자크에 군사를 원조하고, 카자크는 러시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조약의 내용을 놓고 양국의 해석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페레야슬라프 조약으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합병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우크라이나는 단기적 군사 동맹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크림반도를 양도받은 우크라이나로서는 나쁠 것이 없었지만,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인들은 이것을 러시아의 호의로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우크라이나로서는 페레야슬라프 조약으로 인한 영토 편입은 러시아의 강압에 못 이긴 것으로 언젠가는 크림반도를 포함한 동남부 지역을 러시아로부터 돌려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크림반도는 돌려받았지만,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 대부분이 러시아계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통치권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우크라이나 영토가 된 크림반도는 오히려 분쟁의 소지로 작용될 가능성이 컸기에 불안한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크림반도의 애매하고 불안한 상황은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소련이 해체되자 크림반도 주민들은 크림 자치 공화국을 세우고 완전한 독립을 위한 개헌안을 채택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완전한 독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크림반도의 러시아계는 격렬한 항의 시위를 전개했고, 논란 끝에 크림 자치 공화국은 우크라이나로부터 자치를 인정받고 우크라이나에 잔류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크림반도의 러시아계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아니라 러시아 국민으로 행세했기에, 여전히 분쟁의 소지가 다분했다.
크림반도의 불안정과 함께 우크라이나가 당면한 또 다른 문제는 소련으로부터 물려받은 핵무기였다. 우크라이나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핵무기 보육국으로서, 1,900개 정도의 전략핵탄두와 176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44대의 전략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이용해서 국익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이는 러시아와 서방 국가들, 특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가 있었다. 다행히 우크라이나는 1994년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하고 모든 핵무기를 러시아에 돌려주었다. 우크라이나는 인력, 기술력, 그리고 재원에서 러시아의 도움 없이는 핵을 관리할 능력이 없었기에,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러시아로부터는 경제 원조를 받고, 나토로부터는 영토 및 정치적 독립을 보장받는 것이 실리적이라고 판단했다.
우크라이나가 핵확산방지조약에 가입한 또 다른 이유는 나토에 가입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의 가장 큰 우려는 나토의 동진 정책이었다. 구조련 영향권에 있던 동부 유럽 국가들은 끊임없이 나토 회원국이 되길 원했고, 러시아는 그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럼에도 1999년에 체코, 폴란드, 헝가리가 나토 회원국에 가입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회원국 가입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들과 러시아 사이의 완충 지역으로서 러시아의 안보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남기를 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