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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패권을 둘러싼 피의 전쟁(6) 미국과 이라크의 악연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

by 더 클라우드 2025. 8. 14.


이라크 전쟁 (2003~2010)

 

 2001년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 D.C. 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가 발생했다.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 쌍둥이 건물이 비행기 자폭 테러로 무너져 내렸고, 워싱턴 D.C. 에 위치한 미국 국방부 건물의 일부가 또 다른 비행기 자폭 테러로 파괴되었다. 그리고 펜실베이니아 들판에 또 하나의 비행기가 추락했다. 비행기 납치범들이 백악관이나 국회의사당을 공격하려다 탑승객들의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들판에 추락한 것이다. 9.11 테러로 2,996명의 사망자와 최소 2만 5,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상 최악의 테러는 미국을 공포로 몰아갔고, 공포는 이내 분노로 이어졌다. 분노의 대상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었다. 미국연방수사국(FBI)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추종 조직인 알카에다를 주요 용의자로 지목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돕는 '악당'이나 조직, 혹은 나라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첫 번째 악당과 조직으로 빈 라덴과 알카에다를 지목했고, 그들의 근거지는 아프가니스탄이었다. 10월 7일 부시 대통령은 영국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고, 11월 20일에는 ㄴ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점령했다.

 그런데 9.11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한 빈 라덴은 잡히지 않았다. 초조한 부시 대통령은 또 다른 악당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10년 전 걸프 전쟁의 악마가 다시 소환되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었다.

 후세인은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연합군을 꾸려 이라크를 응징해서 쿠웨이트를 해방시켰다. 이를 제1차 걸프 전쟁이라고 한다. 페르시아만에서 벌어진 전쟁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들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를 계기로 알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척결하기 위해서 후세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 갔다.

 2002년 9월 12일 부시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이라크는 이란, 이스라엘, 서방 국가들을 직접 공격하는 테러리스트 조직들을 지원하며, 아프가니스탄을 빠져나온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를 보호하고 있으며, 생물학무기, 화학무기, 장거리 미사일 등을 포함한 대량 살상 무기를 생산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유엔은 그해 11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1441호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이라크는 유엔 사찰을 통한 무장 해체를 받아야 한다고 결의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국내 및 국제적 환경을 조성한 부시 행정부는 다음 해 3월 17일 후세인에게 48시간 내에 이라크를 떠나지 않으면 미군의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예상대로 후세인이 최후통첩을 무시하자 부시는 3월 19일 국방부에 이라크 공격을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제2차 걸프 전쟁, 즉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군 2만 명과 호수군 500명의 지원을 받은 약 12만 5,000명의 미군은 공중 및 지상 작전을 개시했고, 20여 일 만에 이라크 전역을 점령하고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1. 석유 이권을 둘러싼 악연의 시작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수차례 중동 문제에 개입했고, 크고 작은 군사적 행동을 했지만, 공식적으로 특정한 국가와 전쟁을 한 경우는 이라크가 유일하다. 1990년 제1차 걸프 전쟁에 이어 2003년의 제2차 걸프 전쟁, 도대체 왜 미국은 이라크와 두 번의 전쟁을 하게 되었을까? 미국과 이라크의 악연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 정부는 현재의 이라크를 형성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 1921년, 이라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미국의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1927년 이라크에서 대규모의 유전이 발견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이라크 석유 이권에 개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28년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승전국으로서 영국과 프랑스와 함께 이라크석유회사(IPC)의 일정 지분을 배당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동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이 물러나면서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는 석유 이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여기에 미국이 합류했다. 당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많은 석유회사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세계 석유 시장을 독점하던 '7개의 자매회사' 중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회사 외에 5개가 지금 엑슨모빌, 셰브론, 텍사코와 같은 미국 회사였다.

 이후 미국 정부의 중동 정책은 미국 석유회사들이 이라크 유전 개발과 이권에서 유럽 국가들로부터 차별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석유 이권에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는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관심은 제한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미국은 중동 문제에 있어서 중동 지역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영국의 주도권을 인정하며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이라크에 대한 이러한 미국 정부의 무관심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냉전이었다. 냉전의 시작과 함께 미국은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이 이라크에 뻗치는 것을 막는 데에 외교력을 총동원했다. 미국 정부는 미국 석유 회사들이 이라크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유도했으며, 이라크 정부에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제공했다. 1955년에 미국은 중동의 반소 방위 협력체인 바그다드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라크를 회원국으로 참여시켰다. 이라크는 중동에서 안정적인 친미 반공주의 국가로 정착하는 듯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변수가 생겼다. 이라크가 정치적 혼란기에 빠진 것이다. 1958년 7월 14일, 이라크 장교들이 쿠데타로 국왕 체제를 무너뜨렸다. 7.14 혁명 이후로도 쿠데타가 계속 발발했고, 이라크 정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처음에 미국 정부는 이라크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지만, 캐네디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라크 내정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이라크에 친소련 민족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라크 내부의 급격한 변화가 미국 석유회사들의 이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1972년 초에 그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이라크 정부가 이라크 석유회사를 국유화해 버렸다. 미국 정부는 당황했지만, 이라크 정부에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지는 않았다. 당시 이라크가 석유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 정도였기에 미국이나 세계 시장에 끼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미국의 간섭으로 이라크의 친미 기조에 변화가 있을까 봐 우려했다. 이라크의 석유 국유화 이후에 오히려 미국과 이라크 간의 통상은 급격히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