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돈과 패권을 둘러싼 피의 전쟁(7) 미국과 이라크의 악연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

by 더 클라우드 2025. 8. 14.

 

 2. 미국이 이란-이라크전에서 이르크를 지원했다고?

 1979년, 사담 후세인이 권력을 장악했다. 후세인은 신속하고도 강력하게 이라크를 장악하며 이라크뿐만 아니라 중동에서 입지를 키워나갔다. 그는 정적과 비판 세력을 잔혹하게 숙청했다. 정권을 장악한 직후, 후세인은 수백 명의 당 간부들을 회의에 소집한 후, 쿠데타를 모사하는 자들이라고 20여 명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리고 호명된 사람들을 회의장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한 사람씩 총으로 쏴 죽였다. 그 끔찍한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서 이라크 전역에 배포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국정을 운영할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은 후세인의 '공포정치'에 경악했지만, 후세인이 노골적으로 친소련 정책을 펴거나 주변 국가들의 석유 자원을 위협하지 않는 한 이라크의 내정 문제에 관여하길 꺼렸다.

 무엇보다도, 당시 미국의 이목은 온통 이란에 쏠렸다. 1979년 초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고 자신의 이슬람 혁명주의를 이란뿐만 아니라 중동 전체에 전파하겠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호메이니 추종자들이 테헤란의 미 대사관을 급습해서 미국인들을 인질로 잡았다. 66명이나 되는 미국인들이 인질로 잡힌 사건을 대하면서 미국인들은 중동의 문제가 먼 나라 얘기가 아니라 미국의 안보에 직결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정부는 강력한 후세인이 버티고 있는 이라크가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항하는 주요한 보루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란 혁명으로 중동의 상황이 어수선할 때, 후세인은 돌연 이란을 침공했다. 1980년 9월에 시작해서 1988년까지 계속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양국의 사상자 수가 1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1945년 이후 중동에서 벌어진 최악의 전쟁이었다. 미국은 어느 편을 들지 난감했지만 미국의 선택은 이라크였다. 후세인이 악랄한 독재자로 비난을 받고 있었지만, 이라크가 이란의 팽창주의를 막는 주요한 보루라고 판단한 레이건 행정부는 이라크에 경제 원조와 군사 정보를 제공했다.

 1987년, 레이건 행정부는 이라크를 대신해 이란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이란이 쿠웨이트의 주요 석유항에 미사일 공격을 하고, 이라크 유조선을 공격하자, 레이건은 미국과 전 세계의 석유 시장 안정을 위해, 미 해군에 걸프만 순찰을 강화하고 유조선을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1987년 7월 24일부터 1988년 9월 26일까지 진행된 미 해군의 유조선 호송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최대 규모의 해군 작전이었다. 미군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한 이란의 호메이니가 1988년 휴전을 수락하면서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이 났다.

 

 2. 미국의 경제 패권국 위상을 지켜준 나라

 이란과의 오랜 전쟁으로 20여만 명 이상의 이라크 국민이 목숨을 잃었고, 경제는 뿌리째 흔들렸지만, 후세인은 비판적인 인사들을 잔혹하게 숙청하며, 일인 우상화를 강화해 나갔다. 또한 이라크가 믿는 유일한 자원인 석유 자원을 활용해서 군대 재무장에 박차를 가했다.

 후세인은 더 많은 석유 자원을 확보하며 아랍 세계에서 그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미국과 세계는 전혀 예상치 못한 중동의 상황에 당황했다 당시 미국의 눈과 귀는 온통 유럽에 쏠려 있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신호탄으로 동부 유럽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있었다. 후세인은 그런 시대적 흐름을 쿠웨이트 침공의 최적의 순간으로 보았다. 이라크가 페르시아만의 작은 국가를 침공한다 해도 유럽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미국은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을 거라고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후세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부시 대통령은 즉각적이며 단호하게 대응했다. 부시는 '사막의 방패 작전'을 통해 이라크군이 쿠웨이트 이외의 지역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을 배치했다. 19701년대 초부터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의 이슬람 국가 중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우방이었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이 금태환 정지 선언을 함으로써 국제통화 질서에 격변이 일어났다. 세계는 금본위제도에서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변동환율제 시대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1973년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미국의 달러에 대한 신뢰가 급감했다. 세계질서를 주도하던 미국은 가장 큰 경제적 위기를 봉착했다. 이때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 대금으로 미국의 달러만을 받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미국의 달러가 기축통화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로써 미국은 페트로(석유) 달러와 함께 원유 시장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달러 가치를 유지하는 이중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우디 덕분에 미국은 경제 패권국의 위상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사우디에게 군사 장비와 기술 등을 지원하며 사우디 왕가를 정치, 군사, 외교적으로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사우디는 중동에서 이스라엘 다음으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우방이 되었다. 그런데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혹시 그 불꽃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번질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을 포함해서 전 세계 42개국이 참가한 동맹군을 결정해서 1991년 1월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한 후 5주도 채 되기 전에 이라크의 군사, 정치, 통신 목표물에 대한 공습과 지상 침공으로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통제에서 해방시켰다. 쿠웨이트가 해방되자 부시는 곧바로 종전을 선언했다. 미국 내부에서는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해서 후세인을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부시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라크 점령에 따른 미군 사상자와 군사비의 증강 등이 미국 내 여론을 악화시킬 소지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의 매서운 기억은 여전했고, 부시는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까 봐 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