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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패권을 둘러싼 피의 전쟁(8) 국고 1조 달러 이상을 쏟아부은 8년의 전쟁

by 더 클라우드 2025. 8. 16.

 

 2001년 9월 11일 테러가 발생하자, 임기 첫해를 맞는 '아들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테러리스트들이나 그들을 돕는 단체나 국가는 미국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이때 오랫동안 잊힌 악당이 다시 소환되었다. 부시 대통령과 그를 호위하는 매파들은 사담 후세인을 지목하며 그가 모든 중동의 문제와 테러의 온상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크게 부각하지 않았지만, 후세인이 존재하는 한, 미국과 세계 석유 시장의 가장 중요한 통로인 페르시아만이 결코 안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2003년 3월 19일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공격을 명령했다. 이릌바 '2차 걸프 전쟁'이 발발했다. 우연이지만,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 대통령이 두 차례의 걸프 전쟁으 ㄹ수행한 것이다. 전쟁 개시와 함께 미군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라크군을 압도했다.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수도 바그다드와 후세인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고향 티크리트를 함락했다. 후세인은 은신처로 도망쳤지만 미군의 집중적인 수색 끝에 2003년 12월 13일에 체포되었다. 이후 사담 후세인은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2006년 12월 30일 처형되었다.

 사담 후세인은 몰락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그의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아버지 부시는 1차 걸프 전쟁 직후 전쟁을 종결하고 미군을 철수했지만, 아들 부시는 이라크 전쟁을 계속했다. 하지만 무장 반군은 곳곳에서 대미 항쟁을 이어갔다. 이들은 자살 공격, 저격, 차량 폭탄, 도로변 폭탄 등으로 미군을 공격했다. 2003년 12월까지 약 300명의 미군이 사망했는데, 이는 초기 침공 당시 사망자 수의 두 배가 넘는 수치였다. 시간이 가면서 미군 사망자 수는 계속 늘어갔다.

 이라크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국에서는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커져갔다. 초당파 의원으로 구성된 9.11 테러 조사 위원회는 2004년 7월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라크 정부와 알케에다 간의 "협력적 작전 관계"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보고했는데, 이는 미국 ㅈ어부의 주요 전쟁 명분 중 하나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 대량 살상 무기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공화당 의원들조차 이라크에서 즉각 철수하라고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했다.

 부시 대통령의 지지도가 낮아지면서 2006년 중간 선거에 민주당이 상원과 하원에서 과반수를 차지했다.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버럭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오바마의 당선은 부신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었다.

 2010년 8월에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을 종결했고, 2011년 12월에 이라크에서 모든 전투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렇게 해서 미군 4,500여 명이 사망하고 3만 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미국 국고에서 1조 달러 이상의 자금이 투여되었고, 약 10만 명의 이라크인 사망자와 2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8년간의 이라크 전쟁이 종결되었다.

 왜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다양하게 제시되지만, 가장 큰 배경은 9.11 테러의 충격이었다. 분노는 미국인들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미국인들은 전쟁의 명분을 따지지 않았다.

 게다가 '만약' 부시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석유와 관련해서 이라크와 중동에 사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적어도 미국의 석유 패권 안정을 위해서 사담 후세인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했다면, 이만한 기회가 업섰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만약'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부시와 그의 측근들 상당수는 실제로 석유나 석유 관련 회사들의 CEO를 지낸 인사들이었다.

 물론 부시와 측근들의 석유 이권이 이라크 전쟁의 결정적인 이유라고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부시와 그를 둘러싼 공화당 매파들은 미국의 석유 패권을 지키기 위해서나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중동의 평화를 위해서 사담 후세인은 언제고 제거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점이다. 그 기회가 9.11 테러로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