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돈과 패권을 둘러싼 피의 전쟁(9) 황금을 찾아 떠난 대항해 시대의 세 탐험가

by 더 클라우드 2025. 8. 17.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 전쟁 (1492 ~ 1572)

 

 15세기 말, 유럽인들은 지구에 대한 새로운 환상과 호기심으로 들떠 있었다. 1300년경에 출판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비롯한 동방에 대한 얘기들은 꾸준히 인도와 중국 등 새로운 지역에 대한 유럽인의 상상을 자극했다. 그 상상은 사람들을 물질적인 욕망으로 들끓게 했다. 유럽인들은 이미 실크로드를 통해 동방에서 건너온 진기한 물품에 매료되어 있었다. 차와 비단, 그리고 향료들은 그들을 매료시켰고, 동방에는 금과 은이 차고 넘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동방으로 가는 길목에는 무슬림의 오스만 제국이 버티고 있었기에 육로를 통한 교역이 어려웠다. 동방으로 가기 위해선느 항로를 선택해야만 했다. 때마침 지구가 편평하지 않고 둥글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었고,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항해함으로써 대륙 주위에 해양 항로가 있음을 증명했다.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언젠가는 당시 유럽의 반대쪽에 위치한 인도와 중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높였다. 야망이 있다면 누구나도전해볼 만했다.

 그중에 한 명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출신인 그는 이탈리아의 여러 공국들뿐만 아니라 포르투갈과 영국 등의 군주들에게 항해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누구도 콜럼버스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아직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선뜻 콜럼버스의 항해에 투자하기란 도박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도박에 뛰어든 왕이 나타났다. 스페인의 이사벨 1세였다. 1469년 아라곤 왕국의 왕위 후계자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한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은 1492년 1월에 무슬림의 마지막 보류였던 그라나다 토후국을 정복해서 781년간의 이슬람 통치를 종식시켰다. 이로써 무슬림 세력을 몰아내고 이베리아반도를 다시 그리스도교화 하려는 이른바 '레콩키스타(기독교도의 국토회복운동)'의 임무를 종결했다. 레콩키스타의 진취적 기상을 이어받은 이사벨 1세는 콜럼버스의 제안에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이사벨 1세의 지원을 받아 기함인 산타 마리아호를 비롯한 4척으로 항해를 떠났고, 10월 12일 신대륙 본토와 가까운 바하마 제도에서 속한 섬에 상륙했다. 콜럼버스는 그 섬을 '성스러운 구세주'라는 의미의 '산살바도르섬'으로 이름 붙였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곳이 인도의 일부일거라고 믿었기에 그곳의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산살바도르에 도착한 후 콜럼버스는 그의 일기에 "발견한 최초의 섬에 도착하자마자 원주민들로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서 무력으로 그를 사로잡았다"라고 적었다. 그가 얻고자 하는 정보는황금이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황금이 나오지 않자,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실망감은 원주민에 대한 야만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원주민들을 노예로 팔았고 원주민들이 금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네는 그들의 손을 잘라버리는 형벌을 내렸다. 반항하는 원주민들은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지금의 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구성된 히스파니올라섬의 인구는 콜럼버스 이전에는 30만 명이었으나 콜럼버스와 접촉한 이후 2년 만에 10만 명이 죽었다. 원주민의 숫자가 줄어들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데려와서 노동력을 충당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흑인 노예와 원주민 간의 혼혈이 태어났고, 지금도 이 지역에는 흑인과 원주민의 혼혈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이 많다.

 

 1. 아메리카 원주민의 80%가 사라진 이유

 콜럼버스는 어딘가에는 분명 금과 은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인근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등으로 정복을 위한 항해를 계속했다. 1504년 콜럼버스는 네 번의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2년 뒤 사망했다. 그는 죽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못다 한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신대륙으로 향했다.

 황금에 대한 환상이 야망에 사로잡힌 사람과 만날 때 환상은 헛된 공상에서 실제 역사로 탈바꿈한다. 그 역사를 만든 사람이 아메리카 정복사에 큰 획을 그었던 에르난 코르테스였다. 아직 신대륙은 많은 위험이 뒤따르는 미지의 세계였지만, 코르테스에겐 야망을 불태울 기회의 땅이었다. 쿠바 총독이 된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도와 쿠바를 점령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코르테스는 총독의 명령을 거부하고 유카탄반도 원정을 떠났다.

 1519년 2월 10일, 코르테스는 스페인 병력 550명과 원주민 300명, 그리고 대포 10문을 실은 11척의 배로 유카탄반도 원정을 시작했다. 이때 말 16마리가 포함되었는데, 아메리카 대륙에 최초로 말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원정대는 멕시코 동부에 '진정한 십자가'라는 의미의 베라크루스 도시를 세웠고, 인근 원주민 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했다. 코르테스는 타고 온 배를 모두 침몰시켜 버렸다. 쿠바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대원들에게 후퇴 없는 전진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해 8월, 코르테스 원정대는 몬테수마라는 이름의 황제가 다스리는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했다. 유카탄반도를 지배하려는 코르테스와 아스테카 제국을 지켜내려는 몬테수마 간에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손쉽게 테노치티틀란을 수중에 넣었다. 아즈텍족이 코르테스 원정대를 "금발의 흰 피부를 지닌 신이 다시 돌아오리라"라는 예언이 이루어진 것으로 받아들여 코르테스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테노치티틀란에 무혈 입성했지만, 코르테스의 아스테카 제국 정복사는 인류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잔혹사를 남겼다. 처음에는 아즡텍족이 코르테스를 '다시 돌아온 금발의 신'으로 믿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그 믿음이 회의로 변하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온 금발의 신'들이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고, 몇몇 원주민 추장을 살해까지 했다. 아즈텍족은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반란을 진압하며 수도를 완전히 점령하는 과정에서 20여만 명의 아즈텍인들이 정복자들과 그들 편에선 원주민 부족들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다. 돌창과 팔매에 의지한 아즈텍 전사들은 강철 창과 화승총 등으로 무장한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힘없이 무너졌다. 게다가 아직 면역 체계가 형성되지 않았던 원주민들이 유럽의 질병에 노출되면서 아즈텍족 인구의 80%가 사망햇는데, 그 수는 최소 500만 명에서 최대 1,500만 명으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