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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패권을 둘러싼 피의 전쟁(4) 1. 우크라이나인들의 분노와 증오, 그 시작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위치와 경제적 조건을 놓고 볼 때, 우크라이나가 독립 이후에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양국이 함께 윈윈 할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두 민족의 오랜 역사적 기억은 그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소련 시대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기억에는 분노와 증오가 가득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30년부터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에 집단 농장 체제를 도입한 것이었다.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의 농부들을 국가가 운영하는 집단농장으로 몰아넣었다. 이 과정에서 농부들은 땅과 재산을 몰수당했고, 집단농장으로 이주를 거부하는 농민들은 총살당하거나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집단농장화 정책.. 2025. 8. 12.
돈과 패권을 둘러싼 피의 전쟁(3) 4. 훗날 더 큰 비극을 부른 베르사유조약 1919년 초부터 시작된 평화회담은 주로 영국, 프랑스 , 미국, 이탈리아의 '빅 4'가 주도했다. 회담에서는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의 입김이 가장 컸다. 전재로 가장 많은 인명 및 물리적 피해를 입은 나라가 프랑스였기 때문이다. 약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프랑스 산업화의 일번지였던 북동부의 석탄과 철광석 지대는 황폐해졌다. 클레망소의 목표는 독일을 경제적, 군사적, 영토적으로 약화시켜 다시는 프랑스를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역을 할당받고 독일이 라인란트를 비무장화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프랑스는 독일의 경제를 완전히 붕괴하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다고 보고, 독일에 전쟁 책임을 물어 1,300억 마르크(330억 달러).. 2025. 8. 11.
돈과 패권을 둘러싼 피의 전쟁(2) 2. 급격한 산업화로 유럽 시장을 장악한 독일 독일의 '총칼 외교'에 가장 놀란 나라는 영국이었다. 1911년 제2차 모로코 사태에서 독일이 모로코의 아가디르 항에 군함을 파견한 것은 프랑스에 대한 무력시위였지만, 영국은 궁극적으로 영국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다. 영국은 19세기 내내 해상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잇었으며, 어떤 나라도 영국의 해군에 도전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독일이 지중해의 서쪽에서 대서양으로 연결되는 모로코에 전함을 파견했고, 그것은 영국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 아니었다. 당시 영국의 해군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아가르디르 위기'가 세계대전으로 가는 '아마겟돈'이 될 것으로 예견했다. 세계사의 흐름을 읽는 데 탁월했던 그 젊은 정치인은 그때부터 세계 패권의 판도를 뒤흔들.. 2025. 8. 10.
돈과 패권을 둘러싼 피의 전쟁(1)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하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암살당했다. 오스트리아의 변방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의 수도에서 발생한 이 작은 총성이 무려 2,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며 20세기를 여는 '원시적인 대재앙'의 시작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라예보의 총성은 유럽 전체를 볼 때 지극히 지엽적인 사건이었다. 19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에서 지배권을 상실하면서 세르비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발칸반도의 국가들은 독립했다. 하지만 보스니아는 1908년에 오스트리아에 병합되었다. 이에 세르비아가 발끈했다.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반도에서 슬라브계 통일 국가를 .. 2025. 8. 10.